월간조선 인터뷰 1화 "나는 박근혜를 동지로 여겼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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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에서 박근혜대통령 탄핵 소추안이 통과된 지 2년이 지났지만 자유한국당은 여전히 몸살을 앓고 있다. 한동안 소강상태였던 친박과 비박 사이 ‘탄핵 논쟁’이 전당대회를 앞두고 다시 격화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비박계 수장 격인 김무성 자유한국당 의원이 ‘통합행보’를 보이고 있다.

2018년 12월 8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그를 만났다. 김 의원은 ‘탄핵 정국’이후 2년 동안 침묵했지만, 이젠 얘기할 때가 됐다면서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 응했다. 박근혜 정부 기간, 정가에서 소문으로만 나돌던 대통령과 여당 대표의 ‘갈등’에 대해 ‘당사자’가 입을 연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특히 김 의원은 “비극은 ‘공천파동’ 때부터 시작됐다”고 강조하면서 당시 ‘박근혜 청와대’와의 갈등상을 얘기했다. 이와 함께 김 의원은 “최순실 사태 덕분에 탄생한 문재인 정부가 실정을 거듭하고 있다”면서 ‘문재인 견제’를 위한 ‘강한 야당’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박근혜, 2005년 당 대표 시절 ‘오랫동안 지켜봤다’며 사무총장직 제안”

김무성 의원은 자신을 ‘박근혜 대통령과 제일 가까웠던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그럼에도 그는 앞서 얘기한 것처럼 새누리당 내부에서 박 전 대통령 탄핵을 주도했다.

― 박근혜 전 대통령과 왜 갈라설 수밖에 없었던 겁니까.

“나는 박 전 대통령을 ‘동지(同志)’로 여겼는데, 자신을 ‘여왕(女王)’으로 생각한 박 전 대통령은 나를 ‘신하(臣下)’로 봤습니다. 여기서 모든 ‘비극’이 시작된 겁니다. 다들 박 전 대통령을 여왕으로 모셨는데, 나는 그러지 않으니까 결국 ‘친박’에서 몰아낸 거죠.”


― 박근혜 전 대통령과 인연을 맺게 된 계기는 뭡니까.

“나하고 대화 한 번 안 하고, 차 한 잔 안 마신 사람(박근혜)이 사무총장을 제의(2005년)했어요. 나는 그때 재경위원장을 열심히 하고 있어서 ‘지금 보람되게 일하고 있다. 나랑 차 한 잔도 안 마셨는데, 당 대표의 최측근에게 돌아가는 사무총장을 왜 시키려고 하느냐?’면서 거절했어요. 그랬더니 ‘오랫동안 지켜봐서 잘 안다’고 하는 겁니다. 그래도 나는 안 한다고 하니까 나중엔 화를 냈어요. 이후 몇 번 만났는데, ‘당이 어렵다’면서 부탁하니까 맡게 됐습니다.”


― 어떻게 박 전 대통령의 신임을 받은 겁니까.

“나는 당직자 출신입니다. 사무총장 일은 눈 감고도 할 수 있어요. 사무총장 판공비에 손 안 대고 내 돈 써가면서 활동했습니다. 당내 낭비 요인도 정리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1년 만에 매월 2억4000만원 적자 보던 걸 8000만원 흑자로 돌려놓으니 신뢰를 안 할 수가 없었죠. 그때만 해도 박 전 대통령과 나는 이심전심이었어요.”


― 당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의 강점은 뭐라고 생각했습니까.

“품위 있고, 욕심 없고, 학습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 그런 이유로 ‘박근혜 대통령 만들기’에 나섰던 겁니까.

“‘가능성’을 봤습니다. 훌륭한 자질 뒤에 다른 면이 있다는 걸 당시엔 몰랐죠.”

익히 알려진 것처럼 김무성 의원은 ‘친박 좌장’으로 활동하며 ‘박근혜 대통령 만들기’에 주력했다. 2007년에 있었던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경선 당시 그는 ‘박근혜 캠프’의 조직 부문을 맡았다. 당시 박 후보는 조직적 열세에도 일반 당원, 대의원, 국민선거인단 경선에서 승리했다. 하지만 1표를 실제의 5표로 환산한 여론조사에서 이명박(李明博) 후보에게 뒤져 석패했다.

이명박 후보가 경선에서 승리하고,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김 의원은 18대 총선(2008년) 전 친이(친이명박)계의 이른바 ‘친박 학살 공천’에 의해 낙천했다. 이후 그는 ‘친박 무소속연대’를 이끌며 ‘친박 돌풍’을 일으켜 당선된 뒤 한나라당에 복당했지만, ‘친박’ 내에서 그의 입지는 예전 같지 않았다.


― 2008년 낙천 당시 “박근혜 정신에 오물을 끼얹었다”면서 친이계를 비판했는데요. ‘박근혜의 정신’이란 게 뭡니까.

“대선 경선 결과에 깨끗하게 승복했는데도 자타 모두 ‘친박 좌장’이라고 했던 나를 죽였잖아요?”  



김무성(우) 의원은 2008년, 당시 이방호(좌) 한나라당 사무총장이 주도한 이른바 ‘친박 공천 학살’ 때 낙천한 뒤 탈당해 ‘친박 무소속연대’를 이끌며 ‘친박 돌풍’을 일으켰다.





― ‘무소속연대’를 이끌며 ‘친박 돌풍’을 일으키고 돌아왔는데, 이후 박 전 대통령과 거리가 조금씩 멀어졌죠.

“모함 때문이죠. 나를 보는 눈초리부터 달라졌어요. 여러 사건이 있었어요. 이 사람한테 내 모든 걸 쏟았는데, 내 인생이 참 허무했어요.”


― 그때 모함했다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이름은 얘기 안 하겠어요.”


“세종시 논란 이후 ‘친박’과 결별하고 ‘배신자’ 소리 들어”


― 박근혜 전 대통령과 반목하게 된 ‘여러 사건’이란 게 뭡니까.

“2008년 광우병 파동이 있고 나서 이명박 대통령이 정무장관을 제안했을 때 ‘박근혜 대통령 만들기’를 위해 하겠다고 보고했더니 ‘장관이 그렇게 하고 싶으세요?’라고 하는 겁니다. 모욕감을 느꼈죠. 그 당시 나는 이미 언제든지 장관을 할 수 있는 상황이었어요.”


― 뭐라고 답했습니까.

“그 말을 듣고 ‘알겠습니다. 안 하겠습니다’만 하고 나왔어야 했는데, ‘당신이 대통령이 되려면 사고의 유연성, 사고의 민주성을 길러야 한다’고 30분 동안 조언했습니다. 그렇게 나와서 맹형규 정무수석한테 전화해서 ‘못한다’고 얘기했습니다.”


― 이명박 청와대와 친이계가 원내대표로 세우려고 했을 때도 박 전 대통령이 반대해서 무산됐죠.

“1년 뒤에 국회가 안 돌아가니까 박희태 대표가 MB와 얘기하고 나와서 원내대표를 맡으라고 했습니다. ‘박 대표 결재를 받아야 한다’고 얘기하고, 미국에 가 있던 박근혜 대표의 비서실장 유정복 의원한테 전화해서 ‘내가 원내대표를 하면 박근혜 대통령 만드는 데 도움이 된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이번에도 30분 만에 ‘하지 말라’는 답이 왔습니다. 그때도 ‘안 하겠다’고 했죠. 두 번이나 그랬어요. 그런데 최경환(지식경제부 장관), 유정복(농림수산식품부 장관)은 장관을 했지 않습니까?”


― 언제 박 전 대통령과 결별하겠다고 마음먹었습니까.

“미디어법(2009년 7월, 국회에서 가결된 미디어 관련 법률들) 처리 당시 ‘친박’ 내부에서 여러 목소리가 나와서 박 전 대통령한테 ‘지침을 달라’고 했더니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가만히 계십시오’란 모욕적인 대답을 들었습니다. 그 후 ‘내 진정성을 모르고, 모함에 귀를 기울이는 당신이 대통령이 될 수 있겠나’라면서 ‘친박’을 떠났습니다. 그 결별 방법이 ‘세종시’입니다.”


― 박근혜 당시 의원은 ‘국민과의 약속’을 강조하면서 ‘원안’을 주장했고, 이명박 정부는 기업도시로 전환하는 ‘수정안’을 내놨습니다. 그때 ‘친박’과는 다른 목소리를 냈었죠.

“MB 얘기도 맞고, 박 대표 하는 얘기도 맞았습니다. MB의 기업도시안은 그대로 두고, 국민 약속을 지키는 방법으로 대법원, 헌법재판소, 감사원 같은 헌법상 독립기관을 세종시로 옮기자고 절충안을 제안했습니다.”


― 당시 절충안에 대해서 박 전 대통령은 “언급할 가치가 없다”고 일축했었죠.

“30분 만에 박 대표 대변인 격이란 호칭이 붙어 있던 이정현 의원이 ‘일고의 가치도 없다. 김무성은 친박 좌장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다음부터는 나를 ‘배신자’라고 했어요. 내가 ‘배신자’입니까? 다들 세종시 때문에 나라가 망한다고 했어요. 지금도 그런 걱정을 하는 사람이 많아요. 지금이라도 당시 내 제안대로 바꿔야 합니다.” (2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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